이번에는 말레이시아 정치사를 짧게 정리해 봅니다. 말레이시아 여야 구조는 14개 정당의 연합인 국민전선(BA)과 3개의 주요 야당인 DAP, PAS, 정의당(Keadilan)을 축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대 총리에서 5대 총리까지.


독립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한 것은 1957년 8월 31일. 말레이 반도의 11개 주가 연합해서 독립 국가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독립 당시 말레이시아는 세계 최대의 주석, 고무 생산국이었습니다.


당시 국명은 말라야(Malaya)였습니다. 독립 당시 끄다(Kedah) 주 왕자였던 뚠꾸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 총리가 첫 내각을 이끌었습니다. 다수 국민들은 초대 총리를 사근사근하고 친절했던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가 재임하던 1963년 9월 16일 말레이 반도의 남단 싱가포르, 보르네오의 사바와 사라왁이 연방에 속하게 됐습니다.


독립 초기의 정치적 갈등과 충돌

연방을 이끌던 뚠꾸 압둘 라만 총리와 연방의 일원이 된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정치 지향과 개인적 취향 때문에 여러 차례 마찰을 빚었습니다. 복합적인 정치 역학구도를 고려해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해 1965년 8월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사학자들은 싱가포르의 독립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진행된 것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겉모양새야 연방축출이나 연방탈퇴로 포장될 수 있지만, 국민지지를 고려한 정치인들인 뚠구 압둘 라만 총리와 리콴유 모두 싱가포르의 연방 탈퇴를 반겼다는 분석입니다. 연방 차원에서는 혹과 같은 싱가포르가 떨어져나가서 좋고, 리콴유 입장에서는 중국계를 기반으로 했을 때 싱가포르 발전 모델을 장전시킬 확실한 가능성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뚠구 압둘 라만의 동맹당은 1969년 5월 12일 선거에서 크게 패하고 맙니다. 그 이튿날 말레이시아 역사가 잊고 싶어 하는 민족 충돌이 발생합니다. 말레이시아는 이를 ‘5-13 사태’로 기억합니다. 말레이와 중국계가 사이에 발생한 유혈 충돌로 인한 피해자의 총수는 여태껏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을 만큼 아픔이 큰 충돌이었습니다.  이 충돌로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연방 의회는 2년 동안 개원을 미루게 됩니다.


뚠구 압둘 라만 총리는 한때 스스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세 명의 총리 중 한 명”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유혈 충돌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됩니다. 후임은 압둘 라작 후세인 부총리였습니다.


통합 강화

압둘 라작 후세인 총리는 동맹당에 속한 3개 정당에다, 지금은 대표적인 야당인 PAS와 협력을 강화합니다. 그리고 1974년 총선에 나섭니다. 이 새로운 연립 여당은 이후 국민전선(BA)으로 이름을 알리며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선거 승리를 바탕으로 압둘 라작 후세인 총리는 팜오일 산업을 적극 장려하는 등 농업지향 정책을 펼쳐 나갑니다. 정력적으로 행정을 챙기던 압둘 라작 후세인 총리는 재임 중이던 1976년 1월 백혈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의 후임자는 후세인 온 부총리였습니다.


BA의 일원이었던 PAS는 후세인 온의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와 결별을 선언하고, PAS에 대한 지지세가 강한 끌란딴( Kelantan) 주 공략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러나 1978년 총선에서 PAS는 참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PAS가 끌란딴을 다시 획득한 것은 12년이 지난 1990년 총선에서였습니다.


마하티르 시대

유혈 혁명과 백혈병 때문에 2인자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던 말레이시아 정치권의 관례는 독립 4반세기가 가까워오던 1981년에도 재현됐습니다. 전임자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받은 후세인 온 총리는 집권 5년만인 1981년 7월 건강을 이유로 마하티르 모하메드 부총리에게 권한을 넘겨주게 됩니다. 마하티르는 <말레이 딜레마>라는 책에서 초대 총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 대 집권당 UMNO에서 추방되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개인사를 뒤로 하고 이제 화려하게 UMNO를 이끌게 된 것입니다.


마하티르는 이후 22년 집권 기간 동안 국가 경제를 튼튼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전자산업에서 자동차 제조업에 이르기까지 1차 산업 중심의 말레이시아 경제를 2차 산업과 3차 산업 중심으로 뜯어고쳤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고 있습니다. 도로와 항만, 공항 등에 이르는 각종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해 말레이시아 발전의 든든한 초석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외환위기와 그 이후

1997년 아시아를 강타한 외환위기가 말레이시아 경제에도 숨통을 쥐었지만, 마하티르 총리는 철저한 자본통제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갑니다. 태국이나 인도네시아와 달리 자력으로 확실하게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저력을 드러냅니다.


2003년 10월 31일. 마하티르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집니다. 전임자들과 같이 당시 2인자였던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 부총리를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마하티르는 퇴임 이후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지만 후임자를 비판하는 등 정치적 발언을 꺼리지 않고 있습니다.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 총리는 2004년 3월 실시된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BA가 전체 13개 주 중 12개 주를 거머쥐었으며, 연방의회 의석의 90%를 휩쓸었습니다. 당시 BA의 의석 점유율은 당시 득표율 63.8% 보다 훨씬 높은 것이었습니다.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 총리는 2006년 4월 제9차 경제개발 개혁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2006-2010년 5년 동안 달성할 경제발전 청사진이기도 합니다.


박종현 기자의 독립세상 Merdeka http://merdek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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