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08년 11월 28일 기사)

다색의 언어…종교…피부색… 여기 작은 인류를 만나다

기사입력 2008-11-27 18:36 기사원문보기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메르데카(독립) 광장 주변은 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다. 독립 반세기가 지났지만 메르데카는 이곳 사람들이 아직도 가장 좋아하는 단어다.
초겨울의 냉기가 거리를 감싸고, 불황의 그림자가 한반도를 서성댄다. 예상보다 급박하게 찾아든 그림자가 정신마저 혼미하게 한다. 추위에 주눅 든 피부에 돌기가 돋고, 그 이상으로 영혼에 상처가 난다. 상처가 아닌 생채기로 끝나면 좋으련만 주변을 휘감는 불안감이 소시민들을 감싼다. 서로 보듬고 돌보는 인간다운 삶이 그리워진다.

괜히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은 청춘의 마음에서만 샘솟는 게 아니다. 허전할 마음을 채워줄 관광지로서의 매력은 여행하고 싶은 곳보다는, 살고 싶은 곳이 더 강할지 모른다.

이방인 여행객에는 그 대상들이 저마다 특징이 있다. 예술과 문화를 드러내는 게 유럽이라면, 아시아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외지인을 맞이할 때 아시아인 특히 동남아 사람들이 보이는 ‘인간다움’은 유럽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한다. 유럽은 매끈하고 단정한 문화와 생활의 여유를 선사하지만, 사람이 주는 정겨움을 가득 주지는 못한다. 동남아는 이방인에게 얼마든지 관대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곳이다.

#여러 민족, 다양한 문화

냉기도 벗어나고 사람의 수선스러움을 접하려면 동남아는 좋은 후보지다. 동남아의 수많은 도시 중 말레이시아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는 다양한 문화로 여행객을 유혹하는 도시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 내리면 열대 특유의 열기를 느낄 수는 없다. 이웃나라인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공항이 손님을 맞이하면서 풍기는 분위기와 냄새는 접하기 힘들다. 세계적 최고 수준의 공항이 여행자를 맞이하는 까닭이다. 마음에 담아온 뜨거운 태양 하나가 오히려 이곳의 햇살보다도 온도가 높을 정도다.
◇차이나 타운.

공항에서부터 마주치는 것은 ‘다양성’이다. 외국인 입국심사대는 물론 내국인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 이들의 얼굴과 피부색은 제각각이다. 다양한 문화의 교차로답게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이들의 출신이 다양한 까닭이다. 공항을 벗어나 시내에 들어서자 인종의 도가니라는 국제도시 뉴욕과 유럽의 도시들이 부럽지 않아 보인다. 눈만 살짝 드러낸 서남아시아 출신 무슬림 여성이 일정한 간격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자, 앞가슴과 넓적다리를 훤히 드러낸 백인 여성이 불규칙한 보행으로 도시를 카메라 렌즈에 담는다.

환율이 상승해 외국인 여행자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인천국제공항과 수도 서울이 결코 그려내지 못하는 그림이다. 국민은 2700만명이 안 되지만, 말레이시아를 찾는 관광객은 2007년 이미 2000만명을 넘어섰다. 그만큼 많은 외국인이 말레이시아를 여러모로 편하게 여긴다는 말도 된다.

이 땅의 다양성은 세계를 상대로 한 말레이시아의 정책이 성공을 거둬서만은 아니다. 말레이시아는 1세기 전부터 국민의 구성 자체가 다양하다. 원주민격인 말레이인과 중국계인 화교와 인도계 이주민이 눈에 띈다. 말레이계가 절반을 넘고, 화교는 30% 정도이며 타밀 출신 중심의 인도계가 10% 가까이 된다. 나머지 비율은 기타 아시아계와 유럽계가 메우고 있다. 국민 구성이 다양하기에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 또한 다양하다. 국민 대부분이 말레이어와 영어를 구사한다. 여기에 더해 중국어와 인도어도 거리에서 빈번하게 접하는 언어이다. 물론 이곳에서는 종교도 다양하다.

인류의 다양성에 대한 ‘진리’-사람 개개인의 영혼은 작은 조각에 불과해서, 다른 이들의 영혼과 합쳐져 인류의 영혼이 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를 믿는 이라면 쿠알라룸푸르만큼 점수를 줄 도시도 흔하지 않다.

#정원의 도시

우뚝 솟은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KLCC)가 멀리 보이고,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중국식 주택과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는 오늘도 볼 수 있는 쿠알라룸푸르의 ‘어제 모습’이다. 중심가를 휘어 감도는 모노레일과 도시 곳곳을 연결하는 경전철은 오늘을 상징하는 발자취다. 이곳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라는 말이 오히려 진부하게 들린다.

말레이시아를 찾았다면 ‘메르데카 광장’을 둘러보는 게 이 나라에 대한 예의다. 메르데카(독립) 광장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으로 통하는 곳이다.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벗어나 1957년 8월 31일 독립을 선포한 곳이기 때문이다. ‘독립’에 대한 강렬한 희망을 반영하듯, 광장에는 높이 100m의 국기게양대가 있다.

쿠알라룸푸르는 ‘정원의 도시’다. 이곳에서는 상징적인 정원을 거닐어보는 것도 좋다. ‘레이크 가든’은 쿠알라룸푸르의 허파다. 넓이 92ha로 호수 2곳을 품어 안은 세계적 수준의 정원으로 휴지 조각 하나 보기 힘들다. 영국 식민지 시절인 1880년 조성돼 10년 만에 완성됐다.

‘정원의 도시’에는 유독 호텔이 많다. 외국인이 주로 모이는 ‘부킷 빈탕’을 중심으로 버스로 한 정거장 걸릴 공간에 세계적인 호텔 체인들이 즐비하다. ‘부킷 빈탕’은 이 나라 말로 ‘별들의 언덕’이다. 밤의 유흥을 즐기다가는 숙소를 잘못 찾기 십상이다. 도시의 밤을 서성거리는 서양인과 한가롭게 아시아의 문화와 열대의 열기를 주제로 이야기해도 좋다. 관광지에서 늦은 시각까지 골목과 밤의 문화를 느끼는 이들은 관광객이 대부분인 게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이곳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다.

허나 도심을 조금 벗어난 곳을 찾아 이곳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것을 더 권한다. 모스크에서 들리는 저녁 기도소리는 이국적 기분을 한껏 돋운다. 여행에 지친 피곤한 몸 때문에 모스크의 아침 기상 소리를 놓친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는다. 뒷골목으로 들어서 보자. 열대의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곳에 자리한 행상들은 다양한 먹을거리를 선사한다. 쌀밥인 ‘나시 르막’과 닭 꼬치구이인 ‘사테 아얌’을 먹고 시원한 망고 주스를 마시는 기분은 상쾌하기만 하다.

쿠알라룸푸르=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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