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섯 넣어 만든 ‘스님자장’ 향긋하고 담백

스님에게 가끔 대접하던 음식이 주메뉴로
한 달에 몇 차례씩 사찰로 요리 출장 나가


자장면은 인기를 끄는 음식이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도 자장면을 제법 주문한다. 심지어 무슬림인 대학교수도 자장면을 먹고 싶어한다고 한다. 돼지고기를 재료로 사용해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포기하지만 말이다. 스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기를 재료로 사용하니, 아무 중국집에나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강남반점의 장기철 사장은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들을 위해 요리하는 것도 즐거운데, 수입까지 올리니 더 고맙다”고 했다.
그래서다. 청도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음식점이 있다. 금천면 동곡리의 중국음식점 ‘강남반점’(054-373-1569)이다. 이곳의 자장면은 특별하다. 고기가 아닌 버섯 6종류를 재료로 사용해 만든다. 사람들은 ‘스님자장’이라고 부른다. 자장면을 만들면서 돼지기름이 아닌 식용유를 사용한다. 쫄깃쫄깃한 질감이 벌교 꼬막이 주는 쫄깃쫄깃한 맛에 비견된다. 녹차를 넣어 반죽해서인지 초록색 면발이 맛과 모양 모두 향긋하다. 담백하기 그지없다. 뒤끝도 개운하다. 탕수육을 대신하는 음식도 있다. 버섯으로 만드는 탕수채다.

강남반점의 주인은 장기철(53) 신순식(51)씨 부부. 20년 가까이 이 특별한 자장면을 만들어왔다. 스님자장이라는 이름은 유홍준 명지대 교수의 언급에서 비롯됐다. 유 교수가 저서에서 이곳의 음식을 ‘스님자장’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이 굳어졌다.

“저는 스님자장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대신 사찰자장이라고 합니다. 스님들에게 행여 누가 될까 염려돼서요. 운문사에는 학승들이 많은데 매월 초하루에는 수업이 없어요. 그때 학승들이 외식을 하곤 하는데, 고기 없는 자장면을 드시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고기 빼고, 영양은 많은 표고와 새송이 등 버섯을 재료로 삼아 새로운 요리를 만들게 됐어요.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님에게 가끔 대접하던 음식이었어요.”

◇스님자장                                                                ◇짬뽕
스님이 먹는 음식을 보던 일반인이 ‘나도 저렇게 자장면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다른 손님도 주문하면서 야금야금 알려졌다. 의외로 고기 없는 자장면을 찾는 이들이 늘어나 이제는 숫제 주메뉴가 됐다.

그래도 고객으로는 스님들이 우선이다. 음식점을 찾던 날 장 사장은 “어제 출장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강원도 어느 절집에서 자장면을 만들어주고 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사찰출장 중’이라는 안내 푯말도 구비돼 있다. 이번만이 아니라,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자장면 제조 출장을 떠난다. 당일 출장을 원칙으로 한다. 불교를 믿어서 전국 각지의 절집을 찾아다니는 게 마냥 즐겁다. 보통 200명분 이상 주문이 있어야 출장을 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주방시설이 제일 좋은 곳이 사찰입니다. 스님들이 공양을 하기 위해서 현대화된 큰 요리시설이 필요한 때문이에요. 부산 범어사에서 순천 송광사, 인제 백담사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닙니다. 행복하지요. 불교 공부가 절로 돼요.”

청도=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잔설 물러간 천년 고찰… 솔 향기 가득

일주문 없는 운문사… 소나무가 중생 맞아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졌다. 몸과 마음이 가볍고 맑아졌다. 문제는 날씨다. 봄이 왔다고 생각하자, 시샘이라도 하는 듯 전국의 날씨는 ‘흐림’이다. 맑은 기운 받고 와야겠다. 추천받은 곳은 경북 청도(淸道). 이름 자체가 맑은 기운 가득한 고장이다. 풀이해 보니, 맑은 청(淸)과 길(道)이다. 청도 여러 지역의 들판을 메운 푸른 미나리는 ‘청(靑)’의 다른 뜻과 어울린다. 맑은 고장이 봄에는 푸름, 가을에는 붉음을 자랑하는 듯하다. 씨 없는 단감과 대봉시가 가을 청도의 자랑이니 말이다. 청홍(靑紅)의 색감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곳도 드물지 싶다. 청도는 소싸움과 달집태우기로 유명하고, 화랑정신과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3월에는 ‘청도 소싸움’도 예정돼 있어 찾는 재미가 배가된다. 싸움을 준비하는 소들을 만나기 전에 청도 곳곳을 누볐다.

◇신라 때 세워진 청도 운문사의 말사인 북대암에 봄이 찾아왔다. 하늘 향해 치솟은 암벽 아래 운문사 주위를 나는 새들은 청아한 소리를 빚어내고, 계곡물은 맑은 소리를 내며 저만치 달아난다.
청도를 찾았다면 운문사(雲門寺)와 김씨고택(金氏故宅)을 둘러보게 된다. 먼저 찾은 곳은 운문사. 매표소 옆 석주(石柱·돌기둥)에 호거산 운문사(虎踞山 雲門寺)가 표시돼 있다. 호랑이가 머무는 산에 운문사에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국 광저우의 호거산 운문사에서 그 표현을 빌려온 듯싶다. 운문사는 동양 최대의 비구니 사찰. 300명 가까운 비구니가 공부한다. 4년제 승가대학이다. “속세로 따지면 이화여대나 숙명여대쯤 될 것”이라는 설명이 와닿는다. 그렇다면 다른 3대 비구니 사찰인 언양 석남사와 공주 동학사와 비유될 여대는 어디일까.

다른 사찰과 달리 운문사에는 일주문이 없다. 대신 솔 향기 짙은 푸른 소나무가 바깥 세상에서 온 이들을 맞이한다. 소나무들은 꽤 키가 크다. 줄을 맞춘 듯 정렬돼 있다. 파르라니 깎은 비구니의 머리만큼이나 정갈하다. 산문을 들어서는 이의 마음도 정결해진다. 운문사가 창건된 때는 신라 진흥왕 21년(560년) 시절. 진평왕 30년(608년)에 원광 국사가 중창했다. 국사 시간이면 등장했던 세속5계를 화랑에게 알려준 국사다. 신라 시절 젊은 낭도들의 터전이었던 이곳이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자리 잡은 때는 1958년. 승가대학은 1987년에 들어섰다.

◇운문사 입구는 삼림욕장 만큼이나 공기가 맑다.
사찰까지는 평지와 같은 경사도다. 소나무 숲을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화랑이 애국의 마음을 다졌고, 세상을 초탈한 비구니들이 공부하는 곳이어서인가. 느낌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경내에 들어서자 500년 노송이 반긴다. 경내 한쪽을 가득 메울 정도로 가지가 늘어진 모습에 ‘처진 소나무’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전체적으로는 모습이 연꽃을 닮았다. 겸허하면서 자비로운 모습이 따로 없다. 노송은 1년에 한번 술에 취한다. 해마다 삼월 삼짇날을 전후해 막걸리 열두 말을 부어준다. 영양 보충이지만, 당국 입장에서는 주류 간접세 수입원인 셈이다.

운문사에서 겸양의 미덕을 충전한 뒤, 말사인 북대암에 올랐다. 운문사에 비해서는 꽤 가파르다. 북대암은 암벽 기슭에 자리했다. 북대암 마당에서 운문사 전경을 바라본다. 운문사에서는 몰랐는데, 이곳에서 보니 동양 최대의 비구니 사찰도 그리 크지 않다. 의미를 찾고자 여기저기 살펴본다. 밋밋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숲 속에서도 겨울이 밀려간 듯하다. 잔설마저 몰아낸 산과, 산이 만들어낸 공간에 자리한 운문사에 초록 빛깔이 번져간다. 북대암 입구에서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북대암 마당의 높은 나뭇가지 사이에서는 까치 소리가 들린다. 맑은 교향곡이 따로 없다.

비구니들의 도량을 벗어나 찾은 곳은 청도의 고택들. 금천면 임당리의 김씨고택은 내시가 살았던 집이다. 그래서 ‘내시 고택’으로도 불린다. 그 사연이 있다. 내시들로만 가계는 16대까지 이어졌다. 1592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거세된 자들’에게 가계와 가문이 있었다니, 믿기 어려울 수 있다. 답은 바로 입양이다. 내시 집안에 입양시키는 친부모가 많지 않을 듯싶지만, 갖가지 사연으로 입양되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 가계의 마지막 내시였던 이는 통정대부 정3품 벼슬을 지낸 김일준(1863∼1945). 그가 낙향해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어떻게 알려지게 됐을까. 가계의 흐름을 알려주는 가세도(家世圖)를 통해서다. 가세도가 발견된 때는 1980년. 가계를 알려주는 직함과 이름, 산소의 위치가 기록돼 있었다. 족보가 보통 세로의 종적인 기록이지만, 이 가세도는 횡적인 기록이 다수였다. 가로는 A4 4장을 이어놓은 분량이었지만, 세로는 7㎝밖에 안 됐다. 입양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가세도는 입향시조가 정착해 15대까지 양자를 들여 이어온 내력이 담겨 있다. 김일준은 16대이며, 양아들인 17대에 이르러서는 갑오경장으로 내시제가 없어졌다. 18대부터는 정상적인 부자관계로 가계를 잇고 있다.

◇청도소싸움 축제의 결전을 며칠 앞두고 있지만, 우승 경험을 가진 ‘아만세’ 는 여유만만하다.
추억의 언저리를 넘나들다가 찾은 곳은 이서면 가금동. 17일부터 닷새 동안 이어지는 ‘청도소싸움축제’를 위해 체력 훈련 중인 소를 찾았다. ‘아침에 만난 세상’은 한참 몸을 만들고 있었다. 줄여 ‘아만세’라 불리는 이 소의 몸무게는 660㎏이 넘는다. 아만세는 17일 이전까지 660㎏ 이하로 몸무게를 줄여야 한다. 그가 출전하는 체급 ‘특병’의 한계 체중을 맞춰야 해서다. 소싸움은 사람의 격투기처럼 갑·을·병(특갑·특을·특병 포함)체급별로 치른다. 아만세는 2006년 의령소싸움대회에서 3위로 이름을 알린 뒤, 청도소싸움축제에서는 2007년 4위, 2008년 1위에 올랐다. 소 100두를 키우고 있는 우주(牛主) 예병권(49) 사장에게 아만세는 보배다. 그간 벌어들인 수입은 1000만원이 넘는다. 강둑을 달리고, 차에 태우면서 규칙적으로 강훈을 시킨 덕택이다. 그보다는 사람도 못 먹는 한약을 수시로 먹으면서 사랑을 받은 덕택인지 모른다. 소나 사람이나 잘 먹고 즐겨야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법이다. 멀리서 온 기자를 위해 푸른 밭두렁을 거니는 아만세를 보면서, 예 사장이 축제가 끝날 때 “아, 만세” 하기를 기대해 본다.

청도=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새색시 때 물 긷다 매화 자태에 넋잃어”

‘아름다운 농사꾼’ 홍쌍리 청매실농원 대표
매화마을 50여년 땀흘려 일군 ‘매화 명인’
“매화는 자연이 선물한 최고의 해독식품”


전남 광양의 섬진마을은 매화마을로 더 알려져 있다. 원래는 밤나무가 더 무성한 강마을이었는데, 이제 매화의 본고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여기에는 반 세기 가까이 매화마을을 일군 ‘아름다운 농사꾼’의 노고가 있었다.
홍쌍리(68) 청매실농원 대표는 이제 매화를 대표하는 명인이다. 1965년 부산에서 광양으로 시집온 도시 처녀는 농사꾼이 다 돼 농사로 흘린 땀을 아름답게 여긴다. 시부모는 광양에서 알아주는 대농이었다. 시가는 논농사와 밤농사까지 짓고 있었다. 농번기가 따로 없을 정도였다. 부리는 일꾼만 30명이 족히 넘었으니 도시에서 시집온 새댁의 수고가 짐작된다.

“일제 징용에 끌려갔던 시아버지가 매실나무 수천 그루를 사들여 섬진강변 백운산 기슭에 심었답니다. 도회지에서 시골로 시집와 농사일을 몰랐는데 매화꽃이 피면 그렇게 기뻤어요. 밤나무야 한국에 지천으로 많았지만, 매화나무는 없어서 밤나무들을 없애고, 산에 매화나무를 심었지요. 주위에서 반대도 많았지만 그렇게 한 덕택에 해마다 100만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청매실농원을 찾고 있어요.”

스무 살을 갓 넘은 새색시는 이제 일흔을 코앞에 두고 있다. 그래도 곱던 자태는 여전하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적으면 수필이 되고, 시가 된다. 진솔하고 아름답다.

◇청매실농원의 수천 개가 넘는 장독대는 매화를 매화약으로 바꾸는 고마운 생태 공장이다. 홍쌍리 청매실농원 대표는 “흙을 밥으로 삼고, 온갖 식물을 반찬으로 삼을 만큼 농촌을 사랑했다”며 “매화는 자연이 선물한 최고의 해독식품이다”고 말한다.
“원래 고향은 밀양으로 친정이 제법 살았는데, 딸이어서 그런지 친정 아버지가 많이 섭했던 모양이에요. 초등학교까지 나왔는데, 시골로 시집 와서 인생을 제대로 알았지요. 매화는 어느 날 우연하게 내 눈을 사로잡았어요. 물동이를 내려 놓고, 매화의 고운 자태에 넋을 잃었어요. 농사일에 힘들어했던 새댁이 그 길로 매화와 인연을 맺고, 백운산을 꽃동산으로 가꿀 결심을 했어요. 그에 오늘날 이런 모습으로 변한 것이지요.”

사랑을 받아서인지 매실은 무럭무럭 자랐다. 병치레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매실로 치유도 해 보았다. 매실로 음식을 만들기도 했다. 청매실농원에서 매실을 재래식 항아리에 삭이면서 매실 발효액을 만들기도 했다. 매실은 음식은 물론 약으로도 사용하며 그는 매실 명인이 됐다. 드라마 ‘허준’에서 매실이 명약이라는 내용이 방송되자, 매실 인기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그는 돈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부린 게 있다면 우리 땅과 식물에 대한 욕심이었다. 철따라 민들레, 구절초, 상사화, 도라지꽃 등도 찾아다녔다. 그런 덕택에 이제는 밥상 혁명을 이야기하고, 땅에서 보람을 찾아보라고 조언까지 하게 됐다.

“농사를 지어보니, 호미와 삽이 되기도 하는 농부의 손이 진정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도시화다 산업화다 하면서 세상이 발전하는 것 같은데, 질병이 줄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밥과 먹는 반찬이 잘못돼서 그렇고, 육체노동을 안 해서 그래요. 기회 되면 시골에서 육체노동으로 심신의 피로를 없애는 게 좋아요. 부모님 자주 찾아보고 효도하는 게 실은 내 몸 돌보는 것이지요.”

농촌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을 알아본 덕택인지, 언젠가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이런 말을 했다. 그 말이 잘도 맞아떨어진 듯싶다. “남도를 빛낸 두 명의 ‘리’가 있는데, 소설가 박경리 선생과 매화 명인 홍쌍리 선생이 그분들이다.”

농사를 짓는 게 가족 건강은 물론 나라를 건강하게 만드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매화 명인이 유독 분주한 시기가 있다. 광양매화문화축제가 열리는 때다. 올해로 14회를 맞이하는 매화문화축제는 13일부터 21일까지 매화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욕심은 없지만 매화 홍보는 빼놓을 수 없나 보다.

“매화마을 등지에서 공연과 전시, 체험행사가 다양하게 마련됐으니, 매화 문화와 함께 섬진강의 남도 문화도 함께 느끼고 돌아가세요.”

광양=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광양, 남녘의 봄 전령사 매화 꽃망울 ‘툭툭’

겨울의 마지막 저항이 남아 있지만, 봄의 전령사들도 바쁘다. 겨울이 제일 나중에 왔다 맨 먼저 물러나는 남녘의 들판은 초록 빛깔의 보리와 마늘이 차지하고 있다. 봄기운이 느껴지자, 농부의 손놀림도 바빠진다. 새봄에 들녘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봄 식물도 낮에 비닐하우스 문이 열리는 틈을 타, 실내외 온도 격차에 적응하는 훈련강도를 높이고 있다. 내리쬐는 햇살에 성미 급한 식물은 어느새 꽃망울을 터뜨리는 게 이즈음이다. 남도 500리를 굽이굽이 휘감는 섬진강이 넓은 바다로 몸을 의탁하는 지점인 전남 광양을 찾았다. 봄소식의 시작을 알리는 꽃으로 각인된 매화꽃 향기를 접하기 위해서였다. 음력 정월 대보름 무렵에는 꽃구경을 하기에 이른 감이 있지만, 그래도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매화꽃이 군데군데서 수줍은 듯 얼굴을 드러낸다. 이 수줍은 얼굴은 3월 초순을 넘어서면 무섭게 만개한다.

◇매화마을로 유명한 섬진마을 나루터에 작은 배가 정박해 있다. 강 건너가 경남 하동이다.
국내 매화 최대 산지로 불리는 다압면 매화마을을 본격 방문하기에 앞서, 광양 곳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광양제철소는 매화와 함께 광양 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1992년 종합준공된 광양제철소는 단위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광양제철소는 그만큼 광양의 자랑이다. 여수와 남해반도의 방파제 역할로 수심이 깊지만 물결이 잔잔하다는 광양만이 천혜의 입지조건으로 제철소를 품은 것이다. 광양제철소에 들러 24시간 꺼지지 않는 용광로를 보면서, ‘햇빛고을’ 광양(光陽)의 타오르는 미래도 접할 수 있었다.

광양∼여수 이순신대교 2012년 완공

◇지난해 청매실농원의 매화꽃이 만개했던 당시의 모습.
광양제철소와 매화를 자랑하는 광양에 앞으로 2년 후면 또 하나의 명물이 추가된다. 바로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를 앞두고 완공되는 이순신대교다. 완공되면 광양과 여수는 1시간 안팎이 걸리는 거리에서 10분 안팎으로 단축된다.

이순신대교는 여수 본섬에서 묘도를 거쳐 광양을 연결하는 4차선 8.55㎞ 다리로 건설된다. 주탑 2개는 270m로 서울의 63빌딩(249m)보다 높다. 눈길을 끄는 점은 또 있다. 주교각 사이의 거리인 경간(徑間)이 1545m인 점. 이순신 장군의 출생 연도와 동일한 숫자로, 경간은 일본의 아카시대교(1991m)와 중국의 시호우멘교(1650m) 등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길다. 광양만의 월드마린센터 전망대에 올라 광양만을 내려보니, 광양항은 물론·여수·순천·하동·남해 등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광양과 여수 본섬 사이에 있는 묘도는 이순신 장군이 염소를 키워 왜적을 물리쳤다는 곳으로, 전망대에서 잘 보인다.

광양만에서 옥룡면으로 이동하면 전통의 향기와 여유가 느껴진다. 중흥사와 옥룡사지, 동백림, 백운산휴양림의 명소가 나그네를 반긴다. 옥룡사와 중흥사는 신라 4대 고승인 도선 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임진왜란 당시 중흥사는 불에 타고, 승병들은 왜병과 싸움에서 모두 전사했다고 한다. 중흥사는 1963년에 중건됐지만 옥룡사는 아직 그 옛 영화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 아쉬움은 옥룡사지 주변의 동백꽃이 메워주고 있었다. 7000여그루로 이뤄진 울창한 동백숲과 아름다운 산책길이 남도를 대표하는 동백군락지답다.

백운산엔 식물 1000여종 자라

도선 국사가 35년 머물렀다는 옥룡사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국사의 이름은 아직도 인근 마을 주민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테마체험 마을인 옥룡면 양산리 추산마을이 도선국사마을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국사의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백운산은 봉황·돼지·여우의 신령한 기운이 이어지고 있는 영산이다. 신령한 기운을 받아서인지, 국내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다양한 식물 종(1000여종)이 자라고 있다. 섬진강의 마지막 물길이 광양만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산이다. 백운산과 함께 광양 주민들이 추천하는 산이 구봉화산이다. 구봉화산은 근대 이전 봉화를 올리던 산이다. 묘도에서 전해진 긴급한 소식을 중앙으로 이어주던 길목이었다. 정상에 올라 전후좌우를 살피니 주변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튿날 드디어 매화마을을 보기 위해 다압면 섬진마을을 찾았다. 섬진강의 유래는 잘 알려졌지만, 새길수록 마음이 포근해진다. 섬진마을에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많았다. 하동에서 광양으로 왜구가 침입하자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이곳 섬진나루터로 몰려왔다. 왜구는 급히 도망갔다. 그때부터 두꺼비 섬(蟾)을 이용해 섬진(蟾津)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사 지리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60가구가 매화나무 10만여 그루 키워

◇섬진마을 청매실농원의 뒷산에 올라 다른 나무보다 먼저 개화를 알릴 것 같은 매화나무를 손끝으로 느껴 보았다. 3월 초순이면 매화꽃 향기가 이곳에 넘쳐날 것이다. 섬진강 너머의 고장인 경남 하동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섬진강 건너의 하동군 산자락이 보이는 곳에 자리한 백운산 기슭의 매화마을은 3월이면 각지에서 온 상춘객을 맞이하느라 여념이 없다. 이 마을에서는 60여가구가 매화나무 10만여그루를 키우고 있다. 이 중 12만평 규모의 청매실농원은 매화마을의 원조와 같은 곳. 1960년대에 이곳의 홍쌍리 대표가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화나무를 심으면서 매화마을의 시작을 알렸다. 청매실농원은 주차비도 입장료도 없다. 담도 경계도 없지만 청매실농원의 수천 개의 장독대가 앞마당의 경계를 알린다. 뒷산 전망대에 오르면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매화마을과 하동군이 보인다. 화개장터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고향인 평사리의 위치도 미뤄 짐작된다. 섬진강만큼이나 구불구불한 남녘의 고샅길들이 아름답다. 청매실농원의 뒤편에는 대숲길도 있다. 영화 ‘취화선’을 촬영한 곳으로, 봄바람에 사각거리는 댓잎소리가 들릴 정도다.

섬진강이 바다로 변하는 곳은 망덕포구. 남도의 좌절과 희망을 함께 담은 섬진강의 물길이 바다로 변하는 의미 가득한 포구다. 그 중요한 의미를 알기에 광양을 찾는 이들은 이곳에 들러,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곤 한다. 망덕포구에는 이즈음 강굴(벚굴) 수확이 한창이다. 섬진강 하류에서만 수확된다는 이 굴은 강에서 수확된다고 해서 강굴이요, 물속 깊은 곳에서 모양이 벚꽃같다고 해서 벚굴이다. 껍질의 크기가 운동선수 손바닥보다도 크다.

광양=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한국의 현대적 디자인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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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세안센터는 아세안 10개국의 공무원과 기업인을 초청해 ‘산업 디자인·패키징 워크숍’을 연다. 이번 워크숍은 22일부터 26일까지 기업방문과 현장학습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는 공무원과 기업인은 모두 32명. 아세안 회원국 10개 나라 모두 관련자를 파견했다. 이번 방문단은 지식경제부와 서울시 등에서 관련 전문가들을 면담한다. 또 현장방문 프로그램에 따라 삼성전자·LG전자·애경디자인센터·한샘퍼시스·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을 둘러보게 된다. 한-아세안센터는 “이번 워크숍에서 아세안 전문가들이 한국의 현대적 디자인의 장점을 접하며 양국 관계 증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배 눌러보아 단단하면 국산 대게"

죽변항서 13년째 음식점 운영 유호형 씨

경북 울진에는 남쪽의 후포항에서 북쪽의 죽변항에 이르기까지 대게를 맛볼 곳이 많다. 영덕의 강구항에서 울진 후포항과 죽변항을 거쳐 삼척의 영덕 북쪽 강구항을 잇는 도로로, 우리나라 대게의 주요 서식지 왕돌짬(울진 앞바다)이 가까운 덕택이다.

◇해병대 대위 출신인 유호형 사장이 음식점 앞에 서 있다. 음식점 상호와 함께 자리한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문구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죽변항 인근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충청도 횟집’도 대게를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이다. 음식점에 들어서자 날렵한 필치로 각종 물고기를 설명해 놓은 그림에 눈길이 간다. 13년째 이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유호형 사장의 시원시원한 말에도 믿음이 간다.

알고 보니, 예비역 해병대 대위이다. 충남 천안이 고향인 그가 해병대 장교로 첫 근무한 곳이 죽변항 인근이었다고 했다. ‘귀신 잡는 해병’의 장교 출신이지만 지금은 울진대게 홍보에 여념이 없다. 이곳에서는 대게값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자신감이 넘친다.
대신 제대로 대게를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에게 좋은 대게를 고르는 특강을 들었다.

“배를 손으로 눌러보고 눈으로 보면 압니다. 배를 눌러서 단단하면 일단 안심이지요. 눌러 보세요. 단단하지요. 국산 대게입니다. 말랑말랑한 것은 일단 피해야 합니다. 러시아산일 가능성이 커요.”

좋은 대게를 접하려면 국산을 구별하는 눈은 가져야 한다는 설명이다. 외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대게는 거의 러시아산이다. 산호초 지역에서 서식해 껍질에 하얀 석회 성분이 박혀 있어 이물질이 많다. 반면 국산 대게는 다리 살의 결이 부드럽고 깨끗하다.

그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섰을 때 의미 있는 표현을 발견했다. 가게 간판 옆에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독도는 우리 땅보다는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도 ‘독도는 우리 땅’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울진=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밀려오는 파도… 절벽 위의 집 '한폭의 그림'

드라마 ‘폭풍 속으로’ 죽변항 세트장 그럴싸
덕구온천, 국내 유일 자연 용출수 600년 역사


죽변항을 비롯해
울진은 볼거리로도 구색을
갖추었다. 죽변항에는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이 설치돼 바람이 부는 바다의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있다. 바다를 앞에 둔 절벽 위에 자리한 집과 교회가 낭만적으로 보인다. 예전에 찾았을 때는 갈매기들이 힘차게 날갯짓을 하더니 추위 때문인지 이날은 자취를 감추었다. 이 언덕은 2008년도에는 KBS 해피 선데이 울진편이 촬영된 곳이라고 한다. 1박2일 출연진이 이곳에서 묵으며 웃음을 선사했다.

폭풍의 언덕을 지나 대숲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른 키를 훌쩍 뛰어넘는 대나무들이 바닷가 주변에 자라고 있다는 게 마냥 신기했다. 대숲은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찾는 의미를 더하게 한다.

대숲을 돌아 다시 언덕 위로 오르니 죽변등대가 자리하고 있다. 1910년 11월 24일 첫 불을 밝힌 이래 100년 가깝게 죽변항 주변을 항해하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해 왔다. 죽변등대는 대한제국 시절에 착공돼 내부 1층 천장에는 원래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자두꽃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태극 문양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죽변항을 빠져 나와 북으로 달렸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7번 국도의 낭만을 채 담지도 못했는데, 강원 삼척과 경계지에 다다른다. 굴곡진 도로를 미처 빠져나오지도 못했는데, 울진·삼척 지구의 고포항에 다다랐다. 고포항은 인근의 민물이 들어오지 않아 청정지역이다. 고려시대부터 왕실에 미역을 진상할 수 있었던 것도 깨끗한 물 덕택이었다
.

고포마을이 40대 이상 중년에 낯설지 않은 까닭은 1960년대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 때문. 고포 마을은 마을 도로를 경계로 행정구역이 강원 삼척 월천리와 경북 울진 나곡리로 갈린다. 사실은 같은 마을인데, 민가의 지역 전화번호가 ‘033’과 ‘054’로 나뉜다. 가구 수도 각기 17가구로 똑같다고 한다.

몇 발자국만 건너면 이웃이 다른 지역이라는 것은 선거 때면 확연히 드러난다고 했다. 선거벽보가 있던 시절은 물론 지금도 출마자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통합 논의는 없었느냐”는 물음에 “어느 지방자치단체가 마을을 포기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이어 “중앙정부가 개입하지 않고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어민들로서는 나쁘지 않다는 대답도 나온다. “경북과 강원의 지자체로서는 서로 지기 싫어서 투자를 꺼리지 않은 어촌일 것입니다.” 남북한 대치 상황에서 선전마을이 있듯, 이곳도 지자체의 능력을 입증해 보이는 대상이 되는 마을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울진에서는 온천에서 피로를 풀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울진이 자랑하는 온천은 울진 남쪽과 북쪽에 두 곳이 있다. 남쪽의 백암온천은 후포항에서 가깝다. 천연알칼리성 라듐 온천으로 유명한 이곳의 온천수는 53도. 조선 광해군 시절에도 기록이 있을 만큼 역사가 오래됐다. 그래서 인근에 국내 대표적인 리조트를 포함해 숙박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북쪽의 덕구온천은 죽변항에서 가깝다. 1년 내내 42∼43도를 유지하는 국내 유일의 자연 용출수다. 이곳의 역사도 600년이 넘었다. 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1979년 이전까지 주민들이 덕구계곡의 노천탕을 이용했을 정도로 이름을 알려왔다. 2009년 12월 31일 경북에서는 처음으로 보양온천으로 지정됐다.

울진=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죽변항 위판장 꿈틀꿈틀 대게 천지 '울진'

26∼28일 국제울진대게축제
"울진 대게야말로 진짜 대게"…영덕 그늘에 가려서 빛 못봐


세상이 항상 1등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2등도 3등도 꼴찌도 기억의 언저리에 남는다. 그래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개그의 멘트가 인기를 끄는 것은 현실을 교묘하게 잘 반영한 덕택이다.

◇정월 대보름을 앞둔 이즈음 울진대게의 주요 경매장의 하나인 죽변항은 어느 때보다도 분주하다. 붉은 울진대게들이 아침부터 죽변항 위판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경상북도 울진을 찾을 때면 이곳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2등을 하는 고장도 없지 싶다.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이라는 개그 프로그램의 대상이 지방자치단체로 확대된다면, ‘1등만 기억하는…’ 문장은 울진에 딱 들어맞는다. 세상살이 나이테의 무늬와 주름이 제법 잡힌 이곳 주민들의 생각이 그랬다.

“울진예? 강원에서 경북으로 넘어온 게 한 세대 넘지 않았는교? 강원 동해안이라는 생각은 여전하지예. 울진의 대표 상품이 대게와 송이, 금강송 아닙니꺼? 근데 대게는 영덕, 송이는 양양, 금강송은 삼척이 제각기 1등이라고 해서 문제지. 타지 사람들도 울진은 모다 그늘에 가려 2등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2등도 대단하다’는 기자의 생각과 달리, 이곳 주민들은 이런 현실이 못내 아쉬운가 보다. 타지인들이 잘 모르는 현실을 알려주겠다는 심산인지, 사설이 꽤 길다. 어느 공무원의 설명이 이랬다. “대게만 해도 그래요. 영덕의 강구항이 위판장이 커서 이곳저곳에서 많은 대게가 몰리는 것 아닙니꺼. 연안 해역에서 잡는 게 진짜 우리 대게 아닙니까. 그래서 울진대게야말로 진짜 대게라는 것입니다.”

울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려면 꽤 노력을 해야 한다. 서울에서 출발하려면 경부고속도로나 중부고속도로를 타다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강릉까지 가서 다시 삼척을 거쳐 7번 국도를 이용해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강원도 동해안을 이용해 서울과 연결되는 몇 안 되는 영남 지역이다.

그런 수고를 감내하는 보상은 충분하다. 하지만 2등에 대한 울진 사람들의 안타까운 속내를 조금이나마 공감하기 위해서 새벽부터 숙소에서 일어나야 했다. 사위가 고요한 새벽 5시 30분. 온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기운을 헤치며 울진이 자랑하는 포구인 구산항과 죽변항을 연이어 찾았다. 새벽에 찾은 곳은 구산항. 전날 어촌계를 통해 이날 새벽에도 위판장에서 문어가 경매된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구산항은 사시사철 연근해에서 잡은 문어 위판으로 서서히 이름을 알리는 곳. 문어는 울진과 인근 지역에서는 설 차례 상에 오르는 특별 대우를 받는 어종이라고 한다. 목포와 신안 등 전남 일부 지역의 애경사에 홍어가 받는 각별한 대우만큼의 위치를 지녔다고 한다.

◇울진 기성면 구산항에서 죽변면 죽변항을 향해 해안도로를 달리다 만난 일출 장면. 이곳을 찾은 한 사진작가도 막 모습을 드러낸 ‘불덩이’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동해를 건너온 태양이 저 너머에서 미처 얼굴을 내밀기도 전에 문어들이 몸통을 드러낸다. 어민들이 부지런히 잡아온 문어를 풀어놓는다. 옷깃을 파고드는 새벽 포구의 차가운 바람은 잊은 듯, 작은 위판장은 어느새 후끈 달아오른다. 위판장 옆으론 밤새 어민들을 도운 것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고깃배들이 제 모습을 차가운 물속에 비춰보고 있었다. 물속에 어린 모습은 카메라의 뷰 파인더에 담는 모습보다 치열하면서 낭만적이다. 적어도 문어 위판장으로 이곳은 2등이 아니라 1등으로 보였다. 흔치 않은 위판장의 문어 경매를 보고 나니, 배꼽시계가 아침 시간을 알린다. 어시장 인근에서 물곰을 재료로 한 곰치국으로 속을 데우니, 새벽의 냉기가 이내 사라진다.

서둘러 찾은 곳은 죽변항. 죽변항은 남쪽의 후포항과 함께 울진을 대표하는 항구다. 차가운 날씨 때문에 위판은 오전 9시는 넘어야 펼쳐진다고 했다. 기온이 내려가면 위판장에 깔린 대게들이 스스로 다리를 떼어내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란다. 위판이 속전속결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겨울부터 날씨가 완연하게 풀리기 전까지 죽변항 위판장은 온통 ‘대게의 나라’다. ‘게판’이 따로 없다.

◇죽변항에 정박한 고깃배들의 등불 사이로 간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온 대게잡이 배가 보인다. 설 명절에서 정월 대보름으로 이어지는 때에 죽변항은 대게잡이 배들로 분주하다.
지난해와 달리 어황이 좋은 올해의 경향은 이날도 이어진 듯, 어민들과 중매인들의 말과 행동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위판을 마친 60대 어민 부부는 “올해는 대게 풍어”라며 “위판장에서는 대게의 다리가 2개 이상 잘린 것은 경매도 못한다”고 했다. 간혹 경매도 안 된 대게들을 떨이로 구입해 외지인에게 재판매하는 이들이 있어 울진 대게의 명성에 흠집을 남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어촌계에서도 “위판에 실패한 대게는 사지도 팔지도 말자”는 방송이 연이어 나온다. 명품 대게의 품위를 유지하려는 나름의 처방이다.

◇부드러운 맛과 향으로 미식가를 불러모으는 울진대게(위)와 돌문어.
대게에 대한 울진 사람들의 자부심은 뿌리 깊다. 기록이 말해 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평해군과 울진현의 대게를 자해(紫蟹)라고 표기했다. 이 지역의 주요 특산물로 인정한 것이다. 대게는 죽해(竹蟹), 대해(大蟹), 발해(拔蟹)로도 불리는데, 몸통에서 뻗어나간 다리의 모양이 대나무처럼 곧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대나무가 많이 자라 붙여진 지역명인 죽변항처럼 대게와 어울리는 곳도 없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대게 하면 영덕대게로 인정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울진대게보다 영덕대게가 이름을 알리게 된 과정에 대한 울진군의 설명은 이렇다. 불편한 교통이 가장 큰 원인이다. 해산물 소비자가 많은 서울과 대구 등으로 이어지는 교통이 편리한 영덕으로 대게를 많이 반출해, 자연스럽게 영덕이 부각됐다.

그 아쉬움을 메우기 위해 울진은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간 주요 항구와 포구를 비롯해 각 지역에서 ‘2010 국제울진대게축제’를 연다. 살이 올라 대게가 가장 맛있는 때가 설 이후 초봄까지인 것을 고려해, 지난해 축제보다 한 달 이상 앞당겼다. 그 몇 주 뒤에 이웃인 영덕에서도 영덕대게축제를 마련하기로 해, 외지인 처지에서는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울진=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30년 거주 한국인 가이드 강홍미 씨

“잘츠부르크의 매력은 포용성”

잘츠부르크를 다녀오면서 이곳에 30년 가까이 거주한 한국인 가이드 강홍미(51)씨를 소개받은 건 행운이었다. 그는 한국어와 영어, 오스트리아어로 활동할 수 있는 가이드로 이름이 나 있었다.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교직원으로 일하는 강씨는 “잘츠부르크의 매력은 지속성에 있고,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는 포용성에 있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한 세대 가까이 고국을 떠난 이의 한국어 실력이 여전해 보인다. “그렇지 않아요. 수십 년이 흘렀고, 그간 한국에 다녀온 게 한 번뿐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용어를 모르겠어. 1980년대에는 현금지급기라는 단어도 몰랐어요. 인터넷을 모른다는 넷맹이라는 단어도 몰랐는 걸요.”

변치 않은 한국어 실력은 관심과 노력 덕분이었던 것 같다. 한국인 여행자가 오면 모르는 것을 물었고, 인터넷을 통해 고국 소식을 꾸준히 접했다. 인구가 적은 오스트리아가 복지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젠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제가 올 때인 1980년대 초반에는 이곳 사람들이 한국을 전혀 몰랐어요. 이제는 달라요. 저도 감동하는 걸요. 언젠가 고국의 한글 사이트에 접속해서, 오스트리아 연락처를 남겼더니 ‘불편한 게 없느냐’고 인터넷 업체에서 전화가 오는 거예요. 이런 자세로 세계인을 상대로 고객 감동을 불러일으킨다면, 한국에도 수십 개의 ‘잘츠부르크’가 만들어질 겁니다.”

잘츠부르크=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잘츠부르크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를 만나다

게트라이데 거리 예쁜 그림 간판들 눈길
모차르트가 외롭고 힘들 때마다 찾은 곳


잘츠부르크에서 도보 여행자의 발길을 잡는 곳이 게트라이데 거리다. 여행자가 방송국 카메라 기자라면, 이 거리에서 꽤 오랫동안 서성거릴 듯하다. 카페와 음식점, 기념품점 등이 거리의 양쪽을 가득 채웠다. 어느 가게 하나 모나지 않고 아기자기하다. 이곳에서는 눈이 피로하지 않다. 풍경을 보듯 눈이 호사를 누린다. 좁은 골목 사이로 보이는 예쁜 간판은 이곳 걷기 여행의 백미다. 네온사인에 휩싸인 다른 도시의 휘황찬란한 간판과 달리, 소박한 미를 간직하는 이곳이 한없이 정겹다.

◇모차르트 생가.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잘차흐 강과 게트라이데 거리에서 가까운 이곳에서 살았다.
왜 그럴까. 모나지 않은 점도 좋지만, 글자보다는 그림으로 간판이 만들어진 게 재미있다. 그림으로 만든 간판이라. 오래전 글을 못 읽는 이들을 위해 상징성 강한 그림 간판으로 내건 게 계기가 됐다. 상인들의 프로의식이 이만 하면 어느 군주의 애민정신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왕 들어섰으니, 가게의 간판을 쳐다본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주전자 모양의 간판은 무엇을 나타낼까. 이방인 처지에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본다. 그런데 그림을 보고 상상한 그대로다. 주전자와 음료를 파는 가게다. 그렇다면, 가위 모양의 간판은. 똑같은 과정을 반복해 본다. 옷 수선 가게다. 그 옛날 이곳에 들어선 글을 못 읽은 사람은 한없이 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당시의 예술가처럼 오늘날의 여행자는 이 거리에서 예술적 의미를 찾아본다. 생활 속에서 구현되는 디자인 예술이 따로 없다. 물론 이곳에는 서민들의 삶도 스며들었을 것이다. 정원의 거리처럼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올 때마다 싫증이 안 난다는 게 이 거리의 장점이다. 수백 년 지난 가게의 간판만 수백 개가 넘지 싶다. 그래도 주의할 게 있다고 한다. 가게의 일부 후예들이 약간은 질 떨어지는 물품을 판매하는 일도 있다는 게 오래된 여행자들의 조언이다.

간판 구경을 마무리할 때쯤 잘츠부르크의 상징인 모차르트의 생가를 접했다. 그의 원래 이름은 테오필루스 모차르트. 그러다가 ‘신의 총아’라는 뜻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로 이름을 바꾼다. 14세 때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여행은 이처럼 한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을 온전히 바꿀 수 있다.

모차르트 생가는 4층짜리 노란색 건물이다. 그가 태어난 때는 1756년 1월 27일. 25세까지 잘츠부르크에 머물렀던 그가 생가에서는 17년을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17년 국제 모차르테움 협회가 그의 생가를 인수하면서 생가의 기능이 바뀐 것. 1층에서부터 4층까지 곳곳에 그와 가족이 사용한 듯한 바이올린과 피아노 등의 유물이 보인다. 거장의 체취는 이렇게 후대에 전해진다.

◇그림으로 내건 간판이 아름다운 잘츠부르크의 게트라이데 거리. 아기자기한 간판들이라 자주 쳐다봐도 눈이 피곤하지 않다.
기념관에서는 각종 연주회도 열린다. 그중 7월과 8월의 토요일 밤에 들려주는 ‘더 베스트 오브 모차르트’ 콘서트가 인기 최고라고 한다. 촛불을 켜 놓은 채 듣는 모차르트 음악은 어떤 선율일까. 눈 내리는 겨울의 선율과는 다를 것이다. 오스트리아와 잘츠부르크가 문화 산업의 핵심과 출발지로 삼을 만한 곳이다.

오스트리아의 공적인 기관만 그런 게 아니다. 모차르트 음악의 공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바로 모차르트 효과(모차르트 이펙트)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아이들이 영특해지고, 수리과학 실력이 좋아진다는 믿음 말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교수의 연구이다 보니, 신뢰도도 높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고독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선율을 남긴 것과는 별개로. 그 고독에 생전의 모차르트는 잘자흐 강의 흐르는 물길 속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봤다고 한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그가 찾은 곳이 게트라이데 거리였고, 잘자흐 강이었던 셈이다. 35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온 힘을 다해 대작을 만든 과정은 고독에 뿌리를 둔 것인지도 모른다. 그를 느끼고 온 뒤에 듣는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바니’의 선율이 이전과는 다르다.

잘츠부르크=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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